2010 년 기사.        카테고리 없음  2014. 1. 22. 17:51

여기 세계에 유태인 학살과 이민족에 대한 학살에 대한 태도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를린=연합뉴스) 최병국 특파원=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유례없는 어두 운 과거의 짐을 지고 있는 독일이 1백년 전 아프리카에서 벌인 잔혹한 식민 통치와 인종학살이라는 또다른 치욕의 역사 때문에 곤혹스러워 하고 있다.

아프리카 나미비아를 방문 중인 하이데마리 비초랙-초일 독일 대외원조개발부 장관은 13일 독일 대사관에서 나미비아 헤레로 부족 대표들과 만나 "독일은 헤레로 부족에게 특별한 책임이 있다"며 과거 식민 시절 잘못을 사과했다.

비초렉-초일 장관은 "독일은 역사에서 교훈을 얻었으며, 이제는 과거의 장벽을 부수고 화해할 때"라고 말하면서 헤레로 부족이 미국 법정에 독일 정부와 기업을 상 대로 제기한 손배배상 소송 취하를 요구했다.

장관은 이날 대화가 `건설적이고 유익했다'고 밝혔으며, 볼프강 마싱 나미비아 주재 대사는 이날 만남이 `역사적인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헤레로 부족과 독일 인권단체들은 이날 대화가 `진일보한 것'이기는 하 지만 여전히 화해에 앞선 조치로는 미흡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사과의 내용도 물론이지만 무엇 보다 비초렉-초일 장관이 헤레로 부족에 대한 손해배상에 대해서는 거부했기 때문이다.

헤레로 부족과 국제 인권단체와 역사가들은 유대인 대학살 보다 훨씬 앞서 일어 난 `독일인에 의한 최초의 인종 대량학살'인 이 사건이 제대로 조명받거나 정당한 보상이 이뤄지지 못하고 주장해왔다.

지난 1880∼1915년 나미비아를 지배한 빌헬름 2세 황제 치하의 독일제국은 1904 년 1월12일 나미비아 수도 빈 트후크 북쪽 70㎞ 지점의 오카한자에서 헤레로족과 나 마족이 일으킨 봉기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만 명을 학살했다.

당시 황제의 명령을 받은 독일 점령군 사령관은 "독일 영토 내에 있는 모든 헤 레로족들은 총이나 토지 소지 여부 등에 관계없이 총살하라"고 지시한 뒤 1907년 까 지 3년 동안 추적, 학살작업을 계속했다.

독일군은 총과 칼로만 살육한 것이 아니었으며 마을을 초토화시키고 우물에 독 을 풀었다. 사막으로 쫓겨난 헤레로족들은 물 한모금 마시지 못한 채 죽어갔다.

독일의 인권단체 `위협받는 민중을 위한 모임(GfbV)'은 올해 초 낸 보고서에서 "독일인들이 저지른 최초의 `인종학살'에 의해 약 7만5천명이 사망했으며 많은 수가 국외로 탈출해야 했다"고 밝혔다.

GfbV는"헤레로족의 봉기로 시작된 당시 나미비아인들의 저항은 권리를 박탈당하 고 독일 이주민에게 땅을 빼앗긴 유목민들의 생존권 투쟁이었다"고 규정했다.

그러나 독일 정부는 이 사건이 유대인 학살 및 보상과는 다른 문제라고 이를 반 박하면서공식 사과와 보상 요구를 거부해왔다.

대신에 나미비아 정부에 대한 경제원조를 해왔다. 지난 1990년 이후 원조액은 5 억유로이며, 2003 년과 2004년에는 원조규모가 2천300만유로로 줄었다.

반면 헤레로 부족은 명확한 사과와 나미비아 내에서 소수 인종인 자신들에 대한 직접 배상을 요구했다. 결국 헤레로족 후손들은 독일 정부와 당시 식민정책으로 이 득을 본 독일 기업들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미국 법정에 제출했다.

이와 관련해 법률 전문가들은 헤레로부족의 승소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보고있으 나 인권단체들은 "독일 정부는 이 소송을 자신들의 범죄행위에 대해 값싼 변명을 하 는 기회로 삼지말라"며 배상책임 인정을 요구하고 있다.

인권단체들은 또 최근 나미비아에서도 짐바브웨에서 처럼 식민통치의 유산으로 인해 토지를 둘러싼 분쟁이 격화될 우려가 있다면서 독일 정부는 이와 관련해 당시 피해자들의 후손을 돕기 위한 노력을 크게 강화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현재 남은 헤레로족과 나마족은 12만2천명과 6만1천명으로 나미비아 총인구의 약 10%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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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마병들이 길고 짧은 창을 들고 '살인의 추억'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발이 닿는 곳곳마다 보이는 족족 노인, 어린이, 임산부 등 무자비하게 죽였다.

그들은 사람들을 죽이는 걸 내기를 걸고 경쟁하듯이 마치 개미죽이는 듯이 미성년자 관람불가 딱지로 사람들을 거시기했다.

꼬꼬마애덜은  같은 모습으로 잡아 땅바닥에 -삐 해서 - 삐 했다. 혹은 콜라병에 개미들을 쓸어담아 강물에 던져 떠내려가는 것을 돌멩이로 쏴 박살내는 것처럼, 아이를 던져, 살고 싶으면 엄마 뱃속에서 연습하던 것처럼

하라고 했다.

 이것도 지겨우면 에수와 그 제자를 기린다고 교수대를 만들어 한꺼번에 13명을 자린고비의 굴비로 만들고 바둥거릴 때

불 태워버리기도 했다. 그 밖에도 쇠를 달구어 인디언들을 숯불구이 바비큐로 만들었다. 이러한 만행은 7.1채널로 생생하게 울려퍼졌고, 이에 스페인인들은 음량조절을 위해 사람들의 목을 조르게 하거나 입에 콩을 집어넣어 음량을 조절하였다.

이 산지옥을 피하기 위해 도망친 인디언은 스페인인이 풀어논 개에 의해 물려 죽었다.

 물론 이러한 참상을 피하기 위해 인디언들은 스페인인이 오면 극진한 대접을 했지만, 이 악마같은 스페인인들은 그 자리에서  인디언 3,000명을 이유 없이 죽였다.

 그리고는 인디언들에게 우리가 오는데, 환영식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저항하거나 도망가면 모조리 죽인다고 방송을 했다.

이에 인디언들에게 주어진 자유는 죽을 자유였으니, 일가족이 함께 지옥같은 세상을 함께 가거나, 마을 전체가 단체로 집단자살을 하였다.

스페인 관리들은 300명의 인디언을 받으면 단 3개월만에 30명만이 살아남는 재주를 보였고, 인원이 충당되면 그만큼 그들을 죽이는 놀라운 능력을 보였다. 또한 단 4달동안 인디언의 아이 6,000명이 죽는 것을 보았는데, 이들의 부모가 모두

아오지 광산에 끌려갔기 때문이다.

 

가톨릭 선교사들이 나서 학살과 사원 파괴의 만행을 저질렀고요

 

스페인이 과거의 일을 참회하기 위해 가톨릭 인구가 줄고 있다는군요. 다행입니다. 하지만 반성없는 꼴통 천주개독 포르투갈..

 

 

청교도들의 아메리카 원주민 살육

 

북미 원주민의 멸망

 

 





이주민의 쇄도, 땅에 대한 욕심 그리고 충돌
실제로 북미원주민들은 빙하기가 끝날 무렵인 1만4천년 전 시베리아와 북아메리카가 붙어있을
때 지금의 베링 해협을 건너온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미 대륙의 원주민들은 백인들이 그 땅에
발을 디디기 이전에 원시의 에덴 같은 땅에서 그들만의 고유하고 온전한 삶을 이어왔다. 어느 누
구의 손도 타지 않은 이런 무구한 상태는 15세기 후추와 황금을 얻기 위해 인도로 가는 길을 찾
아 나선 탐험가들의 발길이 미치면서 깨어졌다. 그 뒤를 이어 유럽인들은 ‘신대륙’을 향해 대
서양을 건너오기 시작했다. 이들이 신대륙으로 이주한 이유로 맨 먼저 내세우는 것이 종교의 자
유이지만 그것은 여러 동기 중의 하나일 뿐이다. 원주민들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무작정 달려든 이 창백한 얼굴의 이방인들을 적대하지 않고 우호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이주
민들에게 주거지와 먹을 것을 제공하고 땅도 떼어주었다. 그러나 이주민들은 끊임없이 밀려오고
땅에 대한 욕구가 근본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한 충돌과 갈등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여기저기서 간헐적으로 터진 충돌 가운데에서 포카노켓의 메타콤이 일으킨 전쟁은 가장 규모가
큰 본격적인 전쟁이었다. 메타콤은 오랫동안 내러갠싯 족을 비롯한 동부 부족들과 동맹을 맺고
1675년 오만무례한 백인들에 대항해 전쟁을 일으켰다. 여러 달 동안 결사적인 전투가 계속되었지
만 백인들의 엄청난 화력을 당할 수 없었다. 그는 전사들과 친척들을 잃고 아들과 아내까지 적에
게 포박되어 홀로 남았지만 삼림이나 늪을 뚫고 돌아다니며 배반한 부하의 총에 맞아 사살될 때
까지 무릎을 꿇지 않고 끝까지 싸웠다. 그에게 마지막 도피처를 제공한 내러갠싯 족의 대추장인
카노체트도 항복하지 않고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최후의 항전에서 포카세트의 웨타모 여왕도 강
을 건너다가 죽음을 당했다. 백인들은 여왕의 목을 잘라 포로가 된 부하들의 애가 끊어지도록 기
둥에 매달아 전시했다. ‘립 반 윙클’이라는 이야기로 유명한 작가 워싱턴 어빙이 「포카노켓
의 필립」이라는 제목으로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이러한 정경은 백인들이 원주민을 다루는 일
반적인 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휴지조각이 되기 일쑤인 평화조약
이주의 물결은 계속 이어졌다. 특히 1830년대 유럽에 7년여의 대기근이 들자 굶주린 세궁민들은
도제계약 노동자로 신대륙에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한편 1861년에 일어난 미국의 남북전쟁
에서 북군이 승리하자 미합중국의 헤게모니는 북부에 돌아갔다. 갈등을 봉합한 미합중국의 시선
이 이제 아직 미개척지로 남아 있는 서부로 돌려지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미국은 이미 프
랑스의 나폴레옹에게 루이지애나를 매입하고 멕시코와 싸워 플로리다와 캘리포니아 그리고 텍사
스를 미국의 영토로 편입한 뒤였다. 땅에 대한 미국인의 욕망이 광활한 서부를 내버려둘 리 없었
다. 게다가 1848년 캘리포니아에서 금이 발견되자 서부로의 이주는 도화선에 불을 당긴 격이 되
었다. 미대륙 분수계인 콜로라도 산맥에서도 금이 발견되자 골드러시는 중서부 전지역으로 확대
되었다.
이렇게 되자 그 지역을 점하고 있던 원주민의 생존과 존립이 핵심적인 문제로 떠올랐다. 이 당
시 미 중서부 지역에는 네브래스카의 원주민 성소인 ‘검은 언덕’을 중심으로 가장 수가 많고
강대했던 수우 족이 거주하고 있었고 아라파호 족과 샤이엔 족이 그들과 함께 하고 있었다. 록
키 산맥에는 산악부족인 유트 족이 살고 그 서쪽에 네즈페르세 족이 있었다. 아칸소 강 남쪽에
는 카이오와 족과 코만치 족 그리고 남부 샤이엔 족이 와서 거주했다. 남서부의 애리조나에는 아
파치 족이 자리 잡고 뉴멕시코 북쪽에는 나바호 족이 있었다.
어빙이 그려낸 비극적 일화는 1860∼1890년에는 일상적인 일이었다. 백인들은 원주민들과 수많
은 평화조약을 맺었지만 그런 조약들은 그들의 이득이나 편의에 따라 휴지조각처럼 폐기되기 일
쑤였다. 이주민들이 침범해 들어와 자신들을 몰아내려 했기 때문에 땅과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나선 싸움. 일방적으로 쫓기고 몰살당하는 것이었으니 전쟁이나 전투라 할 것도 없
었다. 그러니 이들이 당하는 참상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 중 악명 높았던 샌드 크리크의
학살 장면을 혼혈인 로버트 벤트는 이렇게 전한다. “…남자, 여자, 어린아이 할 것 없이 무차
별 살육이 눈앞에 벌어지고 있었다… 내가 본 죽은 사람은 모두 머리가죽이 벗겨져 있었으며 한
임신한 여자는 배가 갈라져 있었는데 태아가 끄집어내져 있었다. 흰영양의 시체는 성기가 잘려
져 있었다. 나는 한 미군이 그걸 가지고 담배쌈지를 만들겠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직접 전
투에 참가한 미군 제임스 코너 중위도 그 말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 “…나는 한 녀석이 여자의
성기를 잘라 그것을 막대기에 걸어 전시하겠다고 떠벌리는 것을 들었다. 그 녀석은 인디언의 손
가락에 끼어 있는 반지를 빼내기 위해 손가락을 잘라냈다… 많은 병사들이 여자의 성기를 잘라
말안장에 걸치고 다니거나 모자 위에 꽂고 돌아다녔다.”
전투에 참가하지 않은 원주민들도 공격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백인들은 원주민들을 이간시키고
모반을 부추겼으며 그들을 용병으로 고용해 다른 부족을 공격하는 데 정찰대나 수색대로 이용했
다. 이런 식으로 학살을 당하고 삶의 터전이 파괴된 원주민들은 미 정책 담당자들의 주거지역정
책에 의해 고향에서 수천리 떨어진 유폐지역으로 끌려갔고, 혹은 국경을 넘어 캐나다와 멕시코
로 도피하기도 했지만 추격의 발길은 집요했다.

한 민족의 꿈이 거기 죽어 있다
이주의 물결을 막을 수 없는 한 원주민들의 입지가 좁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
다. 그러나 대지는 무한하며 어느 누구의 소유도 아니라고 믿고 있던 이들이 그들의 땅을 나누
어 주었듯이, 전제적인 폭압이나 빈곤으로 미지의 대륙으로 떠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주민들도
원주민들과 최소한도의 공존의 길을 찾았더라면
이런 무도하고 반인륜적인 행위는 범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이런 점은 근본적으로 백인들이 그들과 다른 인종들을 어떤 식으로 보고 있었던가와 관련이 깊
다. 신대륙에 맨 처음 당도한 콜럼버스는 원주민들을 ‘고상한 야만인’으로 보았다. 1862년에
나바호 족을 몰아냈던 북부군의 칼턴 장군에게 원주민은 ‘산 속을 달리는 늑대’이므로 사냥을
해 없애버려야 할 짐승이었다. 다코타의 한 지방신문은 인디언을 ‘여물통의 개’로 부르기도 했
다.
1877년 1월 퐁카 족의 추장 선곰이 500마일 떨어진 주거지역으로 강제로 이주당했다가 죽은 아들
을 고향에 묻기 위해 떠났다. 길을 가는 도중 관을 싣고 가던 그의 일행은 오마하에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 재판의 주요한 논지는 선곰이 ‘사람’이냐 아니냐였다. 그는 다행히 원
주민의 곤경에 공감하는 소수의 백인들의 도움으로 원주민도 사람이므로 이주의 권한이 있다는
판결을 받아 석방이 되었다.
이미 흑인들을 짐승같이 노예로 부리고 있던 오만하고 비인도적인 백인들에게 원주민이 사람인
가 아닌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청교도적인 더 많은 부를 소유하려는 욕망, 자신의 이득만을 좇는
이런 배타적 야망은 소위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이라는 주의로 극명히 호도되어 있다. 그것은 백인들이 신대륙을 다스리도록 운명 지
워져 있으며 지배민족으로서 원주민들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원주민과
평화조약을 맺는 미 정부대표단에 목사나 주교, 선교사들이 참여했고 그들이 다른 누구 못지 않
게 이들을 감언이설로 속이고 그들의 땅을 갈취하는 데 앞장섰다는 사실도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점에서 백인으로 당대의 대중적 인기를 한 몸에 모았던 영향력 있는 소설가인 어빙
이 인디언의 참경을 있는 그대로 절절하게 묘사한 것은 그 자체가 충격적일 뿐만 아니라 그런 적
나라한 언급은 어느 누구의 글에서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전무후무하다.
이러한 허울좋은 명분과 무자비한 강압을 앞세운 백인들의 진군 앞에서 원주민들은 그들이 사냥
하던 들소와 영양처럼 스러져갔다. 검은 사슴의 술회이다. “그 당시 나는 얼마나 많은 것이 끝
장났는가를 모르고 있었다. 이제 나이 들어 높은 언덕에 올라 돌아보니 학살당한 여인네들과 아
이들의 시체가 굽이도는 계곡을 따라 겹겹이 쌓이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게 보인다. 나는 또
한가지가 그 피묻은 진흙 속에 죽어서 눈보라 속에 묻혀 있는 것을 본다. 한 민족의 꿈이 거기
죽어 있다. 그건 아름다운 꿈이었다. 이젠 사람간의 연줄은 끊어지고 흩어져 버렸다. 중심이라
곤 없고 신선했던 수풀은 말라죽었다.”
백인들의 출현은 그야말로 그 자체가 원주민들에게는 저주이며 재앙이었다. 자신들의 땅에 복 받
고 살아온 만년 이상의 세월에 비한다면 한순간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부족이 멸족
을 당했고 살아남은 소수의 원주민들은 여전한 차별과 억압으로 미국인들 가운데 최저의 생활을
구차하게 감내하며 살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지금의 미국땅은 인다안들이 수만년 전부터 살아온 그야말로 지상낙원이었다. 그런데 1490년 유럽에서 컬럼버스라는 친구가 와서는 자기가 신대륙을 발견하였다고 선언하였다.

그는 신대륙에서 많은 금은보화를 얻을 것으로 착각하고 항해를 한 것이다. 그는 아메리카에 도착하여 그런 금은보화가 원주민에게 많이 없다는데에 크게 실망 하였다. 그러나 그래도 주위에 보이는 원주민의 귀금속은 모조리 약탈하여 유럽으로 가져갔고 그후에 몇번 다시 노략질을 위하여 신대륙을 찾아왔지만 큰 성과를 얻지는 못하였고 말년에는 국가로부터의 지원도 끊어지자 술과 인디언에게서 얻은 병 매독으로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그후 1500년대 말 메이훌라우어호를 타고 온 청교도를 시작으로 북미 대륙으로 침입해온 기독교도들은 개척이라는 미명하여 공개적으로 인디안 사냥과 학살을 시작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맨처음와서 추운 겨울에 얼어 죽으로 하는 것을 보고 인디안들이 옷과 음식을 주고 보호해주었는데 그들은 기운을 차리자 은혜를 원수로 갚은 것이다. 그들은 인디안 남자를 모두 학살하고 여자는 그들의 성의 노리개로 삼아버렸다.

이러한 만행은 특히 스페인이 침략한 중남미에서 더욱 심하였으며 그결과 오늘날 중남미에는 순수한 인디안은 거의 없고 메스티족 (인디안 여자 + 스페인 남자 강간) 물라트족 (인디안 여자 + 흑인남자)등의 혼혈족들만 남게 되었다. 한마디로 민족의 씨가 마르고 멸종을 당한것이다.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보자. 만일 컬럼버스가 조선국에 상륙하여 자기가 새로운 땅을 발견하였다고 헛소리하고 그뒤를 이어온 기독교 이민자들이 우리의 남정내들을 모두 학살하고 우리 아녀자들을 겁탈하여 오늘날 한국에는 혼혈족만 남아 있다면 이것이 과연 진정한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이 하는 짓이란 말인가? 또 그들이 믿는 신 야훼가 정말 자비와 사랑의 신이란 말인가?

그런데 오늘의 한국에서의 현실은 이와 같은 아녀자에 대한 겁탈은 없다 하더라도 수많은 한국 국민들이 기독교의 배타성, 잔인성을 모르고 무조건 야훼 하나님만이 진정한 하나님만이라 외치고 그들의 두뇌는 야훼 사상으로 완전히 세뇌되어 있으니 기독교인에게 멸종당한 인디안보다 몇배 더 심각한 지경이 되었다고 볼수있다.

육제을 빼앗긴 민족보다 정신을 빼앗긴 민족이 더욱 불쌍하고 희망이 없는 법이다. 그들은 우리 민족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아브라함, 이삭, 다윗과 그들의 역사를 줄줄이 외우면서도 자기 부모, 조상, 역사 문화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오히려 철저히 부정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

기독교라는 종교에 빠지게되면 아편 중독보다 그 증세가 더욱 심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중독 증세에서 벗어나려면 "성경"이라는 애매모호한 소리로 가득찬 아편을 먹을 것이 아니라 많은 문화, 종교, 역사, 과학 서적을 읽어 분별력을 키움으로서 아편증세에서 벗어날 수 있다. "기독교 죄악사"를 책도 그중에 하나이다.

일본이 잔학한 식민국가임은 분명하지만 기독교인들에 비하면 새발의 피도 안됩니다.
정말 기독교인들은 잔학의 극치를 달리는 자들이죠.
이 세상에 최고의 코미디가 기독교단체가 일본을 욕하는 거죠..
일본과 미국을 비교해보죠..
일본이 처음 한국을 점령했을당시 한국인구는 3000만이었는데 해방당시 인구는 4천만으로 늘어났습니다.
해외인구까지 합친 숫자인지는 잘 모르겠군요.
당시 만주로 이주한 사람들도 많았으니.. 하여튼 인구가 늘었지요.
미국에 식민지가 건설될 당시 미국엔 2500만의 인디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현재 살아남은 순수인디언의 숫자는 20만입니다. 혼혈까지 합치면 이백만이 넘는다고 하고 최대 육백만이란 이야기도 있으나 이들은 혼혈이고 순수 인디언은 단지 20만뿐입니다.
한마디로 몰살당했습니다. 일본이 미국처럼 행했다면 한국인구는 삼천만에서 단지 30만명만 남고 몰살당했겠죠.. 하지만 한국인구는 4천만명으로 늘었지요..
그리고 저 육백만에 이르는 혼혈숫자는 강간의 결과입니다. 성노리개로 가지고 놀았거든요...
이것만 봐도 기독교인들의 잔학성은 상상내지 비교를 불허하는 거의 겨~~엉~~~아~~악 그 자체입니다.
문제는 이 잔학하기 이를데없는 미국의 인디언들에 대한 학살은 기독교인들의 전체 학살역사에선 조그마한 일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것말고도 기독교인들의 잔혹 잔학역사는 끝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종교가 바로 기독교입니다. 천황제국주의자 일본 우익 꼴통쓰레기들도 기독교의 미친개들에 비하면 천사로 보일정도 이니 기독교가 실제론 악마교라고 불러도 틀림이 없지요.

 

<"콜럼버스는 희대의 살인마">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11일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인류 사상 최대의 학살 원흉”이라고 주장했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그는 이날 아메리카대륙 원주민 대표 회의에 참석해“콜럼버스 원정대가 처음 도착한 이후 150여년 동안 스페인, 포르투갈,영국 등 서방 침략자들이 10분에 1명꼴로 원주민을 학살했다”면서 “그결과 원주민 인구는 1492년 1억 명에서 1640년대 300만 명으로 절멸되다시피 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이 침략자들은 히틀러보다 더 악랄했다”고 비난했다.
차베스 대통령은 “그런데도 중남미인들이 ‘콜럼버스의 날’을 기념하는것은 치욕”이라고 말했다. 차베스는 지난 해 콜럼버스가 1492년 10월 12일 바하마 제도의 산살바도르섬에 도착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미국과 일부남미 국가에서 제정한 이 날을 ‘원주민 저항의 날’로 바꾸는 대통령령을공표한 바 있다.
그는 특히 35만 원주민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고 저리로 사업자금을 빌려주는 ‘과이카이푸로(스페인 침략자에 저항한 원주민 추장 이름) 계획’을추진하겠다고 밝혔다.


 1864년 콜로라도 주의 동남부 지역의 샌드크리크에서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아라파호 족과 샤이엔 족의 혼합 거주지로 정부에 의해 주어졌던 이곳에는 당시 남자 장정들은 사냥을 떠난 사이에 280여 명의 부녀자 및 어린이들이 남아있었다. 이 때 미국 기병대들이 기습적으로 몰려와서 원주민 전원을 학살한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기병대 대장 존 치빙턴 대령은 이전에 광산촌에서 기독교 선교활동에 적극적이었던 전직 감리교 목사였다는 사실이다.
치빙턴 대령은 이 사건이 있기 2년전 [글로리에타 협곡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뉴멕시코 지방을 장악하려는 남군의 의지에 쐐기를 박은 북군의 전쟁 영웅으로 콜로라도에서는 '싸우는 목사'로 명성을 날리던 인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원주민들을 핍박하고 학살하는 것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철저한 인종차별주의자였다. 그는 "알을 그대로 두면 이가 되는 법"이라고 하면서 원주민들과의 신사협정을 매정하게 깨뜨려버리고 그들을 몰살시켜버리고 말았다. 지금도 덴버 시로부터 동남쪽 약 1백 마일 지점에 있는 샌드크리크 학살 현장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마을 이름이 치빙턴으로 이름지워져 있는 것은 마음을 더욱 아프게 만드는 역사적 유산이 아닐 수 없다.
샌드크리크 학살에서 자행된 만행은 인디언에게는 뼈에 사무치는 한으로 남아 오늘날에도 샤이엔 족과 아라파호 족 인디언은 어릴 때 어머니의 무릎에서 이 이야기를 듣고 자란다고 한다. 자녀에게 당시의 만행을 이야기 해주는 어머니는 만행의 주범이 백인 목사였음을 잊지 않고 말해준다는 것이다.
백인병사들이 인디언의 머리가죽을 벗기고 사지를 절단하는 등 끔찍하기만 했던 만행의 잔혹성은 1996년 2월 하순 덴버공립도서관이 [진짜 서부]라는 이름으로 열었던 전시회를 통해 생생하게 재현되기도 하였다.
치빙턴 대령은 연방의회와 육군이 샌드크리크 학살에 대한 조사에 착수하여 결국 군복을 벗었으나 덴베에서는 여전히 유지로 행하였으며 1894년 감리교회에서 치러진 그의 장례식에는 조객으로 가득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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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는 콩고민주공화국을 1885년부터 지배하였습니다.

콩고를 지배하던 벨기에는 고무를 착취하면서,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마을 주민을 학살했습니다.

이에 따라 적게는 1,000만 명에서 2,000만 명에 달하는 콩고인이 학살되었는데,

인구비례로 보면 무려 40~70%에 달합니다.

결국 영국이나 미국 같은 나라들의 항의로 레오폴트 2세는 학살을 중단합니다.

그러나 콩고는 벨기에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1960년 콩고가 벨기에에서 독립한 이후 벨기에는 아무런 입장 표명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실 국제적으로 이는 전혀 논의되고 있지 않습니다 =ㅅ=

 

물론 영국이나 미국의 경우에도 항의할 처지는 못 됩니다.

영국은 호주 원주민을 무차별 학살했고,

영국인들에 의해 세워진, 원주민에게는 '식민 정부'는 원주민의 정체성을 말살하려고 했습니다.

수 많은 어린이들이 원주민의 문화를 배울 수 없도록 강제로 부모한테서 격리되었습니다.

현재 호주 총리가 2007년에 사과를 했고, 미국의 경우에도 사죄가 이루어졌습니다.

 

그 외에도 독일은 나미비아를 지배한 이후 나미비아의 헤레로 족의 가축과 땅을 빼앗았습니다.

헤레로 족은 1904년 독일인에 저항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제국주의 독일 정부는 헤레로 족에 대한 몰살을 지시했고,

헤레로족의 80%가 살해당했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도 수용소에 강제로 이주당해 생체실험을 당했습니다.

독일은 1990년대까지 사죄를 거부해 오다 최근에 사죄를 했습니다.

 

 

전쟁을 일으켰으니 벌을 받아야 한다고요? 일본과 전쟁한 열강은 다른 원주민 나라를 침략하여 힘없는 원주민을 착취하여(정당하게 강한 나라를 정복한게 아니라, 깃발만 꽂고 자원을 수탈하였습니다)

 

이건 침략이 아닌가요? 그리고 세계 1차 대전을 일으킨 비스마르크한테는 왜 아무도 누구도 욕을 하지 않을까요? 유태인을 죽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비스마르크가 일으킨 1차대전때도 수백만명이 죽엇습니다..

 

영토를 정복하기 위해서 전쟁이 일어나고, 사망자가 발생하는 건 어짜피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나쁜 일이죠. 히틀러보다 더 잔혹한 포르투갈, 스페인,미국은 왜 지탄 받지 않는 것일까요?

 

식민지 착취를 한 포르투갈,벨기에,스페인,네덜란드,일본,영국,프랑스,이탈리아,독일,미국 모두 받아야겠죠.

 

여러분은 말할 것입니다. 그건 과거 일이고, 예전 일이라고, 그들은 바뀌었다고. 저도 동감합니다. 일본도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조선 극우들은 왜 옜날 1세기 전의 일을 아직도 헐뜯나요?



 

마녀마남 처형 색깔 설명

하늘색 : 처형이 없었던 곳                       
연노랑 : 100 명 이하
진노랑 : 1000 명 이하
오랜지 : 7500 명 이하
분홍색 : 7500 명 이상
빨강색 : 15000 명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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